야근 못하자 쪼그라든 월급…낮엔 조선소서 용접, 밤엔 배달 뛴다

입력 2021-09-12 17:31   수정 2021-09-17 17:44

조선소 용접공인 B씨 부부는 최근 야간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후 B씨의 실수령액이 월 200만원대로 줄어 자녀 교육비와 생계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다. B씨는 아내를 데려다주는 픽업 기사 역할을 하고 대리운전은 아내가 한다. B씨 아내는 “남편은 매일 아침 조선소로 출근하기 때문에 내가 대리운전을 맡게 됐다”며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한숨을 쉬었다. ‘투잡’에 지친 생산직 근로자들의 이탈도 가속화하고 있다.

최저임금 올려도 이탈 속수무책
조선업은 현재 사상 최대 수주 실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사내협력사들은 웃지 못하고 있다. 낮은 선가와 원자재 가격 급등에 따른 후판 가격 상승으로 실제 이윤이 거의 남지 않기 때문이다. 주 52시간제는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조선업 생산의 80%가량을 담당하는 조선회사 협력사들은 모두 300인 미만 중소기업이다. 한 현대중공업 협력사 사장은 “주 52시간제 시행 후 조선업계 임금이 근로자당 평균 100여만원씩 줄어 1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조선사 사내협력사의 임금은 월 고정수당보다 시급 비중이 월등히 높다. 기본 시급의 1.5배 수준인 잔업·특근이 많아 부족한 수당을 메우는 임금 구조다. 근로자들이 주 52시간제로 잇따라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다. 한 삼성중공업 협력사 사장은 “최근 경기 평택 삼성반도체 공장 공사현장으로 대거 이직했고, 다른 협력사 퇴사 인력도 대부분 수도권 건설현장으로 갔다”며 “임금이 30%가량 높은 데다 조선업에서 배운 용접 등 기술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선업의 인력난은 내년에 더 심각해질 전망이다. 올 들어 잇따라 수주한 선박들이 설계를 거쳐 내년부터 본격적인 제작 공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조선해양플랜트협회는 조선업 인력 부족 규모가 내년 1분기 1500명에서 2분기 4700명, 3분기 8900명 수준으로 점차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90% 이상이 50인 미만 영세업체인 뿌리업계도 인력 이탈이 심각하다. 뿌리산업 종사자의 10%가량을 차지하는 5만여 명의 외국인 근로자는 잔업·특근이 가능한 소규모 사업장이나 임금이 더 높고 산업재해 위험이 적은 농촌으로 이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뿌리기업이 조선업종과 함께 대표적인 주 52시간제 피해 업종이 된 것은 임금에서 잔업·특근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두 업종 모두 청년층의 취업 기피에 외국인 근로자 공급마저 막히면서 생산 차질이 불가피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저임금 급등으로 단순 임가공·비숙련 근로자들의 임금이 크게 오르면서 숙련공의 이탈도 부쩍 늘고 있다. 이의현 한국금속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수십 년간 기술을 갈고닦은 숙련공의 임금까지 올려줄 여력이 없다 보니 이들이 회사를 떠난다”고 지적했다.
편법 근무제 등장…“범법자만 양산”
원청업체의 갑작스러운 주문에 단기간 업무량이 몰리는 뿌리산업에선 사실상 주 52시간제를 지키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지난 4월부터 탄력근로제의 단위기간을 기존 3개월 이내에서 최장 6개월로 늘리는 등의 보완대책이 시행되고 있지만 큰 실효가 없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경기 시화산업단지의 한 뿌리기업 사장은 “탄력근로제는 실질적으로 임금 변동이 없다는 점에서 근로자도 꺼리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근로자의 이탈을 막기 위한 각종 편법도 등장하고 있다. 출근 도장을 찍지 않거나 연장근로 수당을 장부에 남기지 않고 현금으로 지급하는 식이다. 야간작업이 필요하면 동종 업종의 다른 회사와 인력을 ‘맞파견’해 그날 일당을 장부에 남기지 않고 현금으로 지급하는 사례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 김포지역 한 제조업체 사장은 “납기가 코앞인데 외국인 근로자를 구할 수 없어 불법체류자를 고용해 쓰고 있다”고 했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만성적 인력난에 허덕여온 중소기업계의 현실과 코로나로 외국인 근로자 입국마저 막힌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주 52시간제를 강행해 누구도 지킬 수 없는 법이 됐다”며 “664만 개 중소기업을 잠재적 범죄자로 모는 법”이라고 지적했다.

안대규/민경진 기자 powerzani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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